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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글 †[2024.07.18] 치사키 쿠니카
결연 24-07-18 07:08 18
치사키 쿠니카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린이집 연극 무대에 서 '지나가는 사람'을 연기한 것이었다.

연기조차 필요 없을 정도의, 단순히 배경을 채우기 위한 엑스트라 A. 모든 아이들이 주역을 맡을 수는 없다. 모든 아이들이 무대에 설 수는 없다.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운 좋은 몇 명 중에서, 쿠니카는 그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은 역을 떠안았다.

배역을 정하는 것은 차례차례 진행되었다.

왕자님이라면 A코가 어울린다.
공주님이라면 B타가 어울린다.
시종이라면 C야가,
전령이라면 D나가.

배역은 쿠니카가 어울리다고 생각한대로 배정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애들은 그 자리에서 가장 빛났다.

'이걸로 괜찮겠니?'

선생님이 그렇게 물어보고나서야 쿠니카는 하나 남은 배역 명찰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어린 마음에 싫다고 말할 법도 했건만 쿠니카는 대답했다.

'전 이게 좋아요!'

주역들은 가장 빛나는 곳에서. 주역들이 빛날 수 있게끔 받쳐주는 조연들은 가장 아래에.

쿠니카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었다. 얼굴 없는 배역. '몰라요'라는 한 대사만 말하면 끝나는, 목소리 없는 배역. 사람들의 기억에 잔류할 일 없을, 잔잔하고도, 고요한, 무대 뒷편.

어린 쿠니카는 폭죽이 쏟아지는 커튼 콜 무대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인생도 연극과 똑같았다.

가장 빛나는 사람들은 재능을 뽐내며 높은 곳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어쩌다 한 번 스스로 계단을 쌓아올린 범재가 가장 높은 곳에 닿았다. 그들이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얼마나 높고 낮은지를 알려주는 것은.

가장 평범한, 가장 중간에 위치한, 엑스트라 A, B, C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6년. 치사키 쿠니카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언제나 똑같았다.

성격 무난하고, 성적도 보통, 운동신경도 보통. 어디에 던져놓더라도 무난하게 잘 지낼, 지극히 평범한 현대 일본의 남자 고등학생.

간혹 그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그늘지고 메마른 눈동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소름끼친다고 말하는 이가 있긴 했지만, 쿠니카와 친해진 뒤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곤 했다.

무난하고,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

쿠니카는 그 평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삶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라 말하는 걸까? 특별하지 않으면 살아있지 않은 걸까? 특별하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위인전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은 항상 그랬다. 위인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뒤에서 받쳐준 수많은 '평범'은 조명받지 못했다.

쿠니카는 그게 싫었다. 그렇다고 딱히 평범하려고 노력했던 건 아니다. 쿠니카는 그냥 천성이 평범하게 좋은 애였고, 어느 무리에든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애였고, 그런 자신의 평범함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엑스트라 A.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로 그렇게 내뱉으면 그들도 장난기 있게 웃으며 동조했다. 정말 딱 어울린다고.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듣고, 숙제를 깜빡한 친구에게 노트를 빌려주고, 점심시간 즈음엔 다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남은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언제나와 같은 일과.

딱 하나 특별한 게 있었다면, 그날따라 저녁놀이 무척이나 분홍빛이었다.

쿠니카는 서점에 들러 점프 신간을 사고, 한 달에 한 번은 신간이 나오는 추리소설 작가의 책도 한 권 샀다. 서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골목과 골목이 이어진 복잡한 미로 같은 곳이었는데, 쿠니카는 어렸을 적부터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길을 좋아했다.

하지만 보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평범한' 삶에 그런 특별함은 끼어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골목길을 돌아도, 평소처럼 어둡고 쓰레기가 간혹 버려진 골목길만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치사키 쿠니카는 쓰레기 사이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피를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붉은 빛. 빛을 내기는 커녕 어둑어둑해져가는 주변의 빛마저도 모조리 빨아먹는 것 같은 불길한 그 수정은 누군가 일부러 그곳에 놓은 것처럼, 이것은 꼭 너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평범함은 좋다. 자신은 평범하니까. 영영 특별할 수 없으니까, 그저 평범함을 받아들였을뿐이다.

특별함에 대한 동경이 없을리 없었다. 그저 애써 무시했을뿐. 분수에도 맞지 않는 꿈을, 그 가능성마저도 부정했을뿐.

하지만 '저것'을 손에 쥔다면, 그런 평범한 자신도 특별해질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애초에 저것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쥐어라. 비일상을 바란다면, 누구와도 다른 특별함을 바란다면—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주겠다고.

쿠니카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그 수정은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크기로, 심장처럼 두근거리며 맥동했다.

…… 이제 어떡해야 되지…….

그러나 막상 손에 들어온 갑작스런 '특별함'은 마음속을 마음껏 휘저었다. 위험한 물품일 수도 있다. 어쩌면 방사성 물질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신고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단순히 주웠을뿐이니까, 불이익이 돌아오지도 않을 테고.

쿠니카는 특별을 바랐다. 그러나 정체도 모를, 위험해보이고 무서운 것에 기댈 정도는 아니었다.

1, 1, 0.

휴대전화를 켜 그 짧은 번호를 누르자마자 어디선가 날아온 '무언가'에 휴대전화가 작살났다. 쿠니카는 직감했다. 화살, 총탄, 혹은 그 무언가. 무엇이든, 살상력이 있는 무기.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것은 확연히 이형의 존재였다.

"이번엔 성공할줄 알았더니."

피가 굳은 것 같은 보석이 몸의 우반신을 덮은, 이형의 존재. 손 안의 수정과 비슷한 느낌이 났지만, 손 안의 것이 더 위험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그건 레니게이드 응집체거든? 이 도시 곳곳에 뿌려 뒀어. 그런데 하나같이 사라지거나 신고당하거나……. 어떤 쥐새끼 때문도 크지만 너 같은 소시민 때문도 있어. 그래도 나름 욕망은 있어 보여서 일부러 거기에 뒀더니. 결국 그딴 선택이라 이거지."

레니게이드? 도시 곳곳에 뿌려? 욕망?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시당초, 이형의 그것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사고는 마비되어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주춤, 저절로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가 발목을 꿰뚫어 쿠니카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아픈 것은 정말 난생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확연한 악의를 담은 공격을 받은 것도,

"그래도 요즘은 쥐새끼가 조용하니까……. 꼬마야, 제안 하나 하자. 거기서 그 수정 삼키면 살려줄게. 대신 거절하면 이대로 널 죽일 거야. 그래도 즉사시켜줄 테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자…… 이제 어쩔래?"

협박을 받은 것도, 난생 처음. 사고가 마비된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발목을 부여잡은 채 끅끅거리며 울고 있다는 것도, 손에 쥐고 있던 수정은 눈앞에 떨어져 있었다.

죽는다고? 그건 싫어.
저걸 삼키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저렇게 되는 거야? 무서워!

마비된 머리가 애써 사고를 회전시킨다. 그런데도 결국 답이 나오지 않아서, 쿠니카는 울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못 본 걸로 할게요……. 저는, 저,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놔 주세요. 제발 보내 주세요. '저것'을 삼키는 것도 죽는 것도 둘 다 싫어요.

이형의 존재는 한숨을 쉬었다. 꽝, 꽝, 꽝. 이놈도 저놈도 전부 꽝에 애써 뿌린 씨앗은 어떤 쥐새끼가 빼돌려 처리한 상황. 마지막 도박에서마저도 꽝이었다. 그것도 꽝 중의 꽝.

—그러면 죽여야지.

그는 레니게이드를 움직여 송곳 같은 수정 비수를 만들어냈다. 오버드도 아닌, 고작 일반인 하나를 일격에 죽이는 일따위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쿠니카는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무기를 보았다. 황망한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이윽고 그것을 쏘아내려는 손짓이 보이자, 쿠니카는 결국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아프지 않았다. 예상했던 심장이나 머리의 격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일격에 죽은 건가?

하지만 눈이 뜨였다. 눈이 뜨이고, 그 앞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분홍색이 얼핏 섞인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그 갈발의 여성이 이형의 존재를 물리쳤고, 쿠니카의 앞에 놓여있던 수정을 수거했으며, 꿰뚫린 발목을 어떤 신비한 힘으로 치료해주었다는 것밖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쿠니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굳세어 보이는 인상. 그러나 그 한켠에 얼핏 담겨 있는 다정함, 그리고 상냥함.

쿠니카는 평범한 사람이 좋았다. 특별한 사람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사람은, 특별한 사람보다도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 강인하고, 다정했으며—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다 됐어. 그래도 한동안 무리해서 움직이지는 말고 ……. 미안해, 내가 더 빨리 파악하고 빨리 도착했으면 네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얼굴이 새빨개졌다, 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전후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잠시 참고인 조사가 필요하지만 충격을 받았을 테니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처럼 형식적인 말을 그가 내뱉고 있었으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쿠니카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저, 저기."

새빨간 얼굴, 원치 않게 더듬고 마는 말, 떨리는 목소리.

"저는 치사키, 쿠니카, 예요."

묻고 싶은 것을 먼저 묻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해버리고 마는 입.

"…… 그게,"

망설이는 마음.

"서, 성함……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에도, 그것들을 뛰어넘어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강렬한 동경 혹은 사랑의 감정.

치사키 쿠니카는 깨달았다.

이 평범함에 대한 집착을 깨부수어 줄, 특별보다도 더욱 특별한, 유일한, 누군가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사랑은 이타적이다. 동시에 배타적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오직 그 대상만을 특별히 여긴다는 뜻이며,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쿠니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게 된 '가나하 씨'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가나하 씨가 그 사람과 행복해지는 편이 자신은 더 만족스럽고 행복할 것 같았다.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쿠니카는 사랑을 동경으로 포장했다. 당신이 누구보다도 멋지며 동경스럽고 동생이 되고 싶다며 떠들었다. 멋대로 누나라고 불러도 차마 쳐내지는 못하는 모습에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마냥 좋았다.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곁에 남을 수 있다.

당신의 행복을 지켜볼 수 있다.

그것이 치사키 쿠니카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었고,

그가 지금껏 지켜왔던 평범함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자신을 가둔 굴레를 부수어준, 누구보다도 멋진 비일상을 향한—

—그의, 최선의 순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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