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오직 사랑만이
조각글결연2025.06.24 14:14

*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G25 이클립스 엔딩 부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주밀레 설정 누수 주의



 ̄ ̄저도 알고 있어요. 이 세상은 확실히 저희에게 상냥하지 못했죠. 죽지 못해 사는 당신, 살지 못해 죽는 저. 어느 쪽이 더 가혹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대답할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죠.

그렇다면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그대에게 모되게 굴었던 이들. 만신창이가 되어가며 구해주어도 그걸을 당연한 권리인 양 여기는 약자들. 구하지 못한다며 비난하는 이들. 그대라면 겪어보았을 텐데. 그리고 뼈저리게 깨달았을 테지…….

뼈저리게 깨달았죠. …… 이기적인 사람이라서요, 저는. 딱히 정의감이 넘쳐서 그들을 구한 게 아녜요. 그저 그들을 사랑했을 뿐이죠. 그리고 제가 사랑한 만큼 그들도 저를 사랑해주기를, 그저 그것만을 바랐어요. 그런데 세상은 그것마저 허락치 않더군요. …… 얄궂게도요.

그대, 그렇다면 내 제안을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아. 아무런 의지도 힘도 가질 생각 없이, 그저 당연하게 기대어 바라기만을 하는 족속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대라면 알아줄 거라 믿어.

어쩌면 그러는 게 옳을지도 몰라요. 사랑하고, 배신당하고. 그 뒤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어느샌가 또다시 저를 경외하고 동시에 바라고 있더군요. 하지만 베임네크. 그거 아세요?

저는 그렇게 되더라도 그들이 사랑스러워요. 약하고, 누군가에게 쉽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동시에 누구보다도 저를 걱정해주고. 제게 부담을 지우기 싫다며 스스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저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해요. 그게…… 너무 사랑스러워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저를 무너지게 해요.
저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저를 먼저 믿어주었고 먼저 사랑해주었으니까요.
 ̄ ̄그러니까, 베임네크. 제발.

이제와서 그만, 이라는 말이라도 할 셈인가? 이미 늦었어, 밀레시안. 운명은 그대를 나의 앞으로 이끌었고, 나를 그대의 앞으로 이끌었지. 이것은 안배야. 동시에 필연이고. 그대가 나를, 나만을 위해 준비된 안식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당신이 먼저 제게 손을 내밀었죠.

그래, 분명 그랬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내버려 뒀어…….

어쩌면 그것도 분명히 맞는 말일세.

당신이라면 잘 알지 않나요? 발로르 베임네크. 당신네들 족속에겐 평생, 영원히 단 한 명 뿐이잖아요. 저보다도 더 절실하게 알고 있잖아요…….

그렇더라도 이젠 멈출 수 없어.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그대…… 나의 파멸자는 지금 검을 들고 내 앞에 섰지. 이 이상 망설일 이유가 있나?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없어요.

하지만 그대는 해내야 해.

당신이 죽더라도 영영 저주할 거예요, 베인.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축복하도록 하지.

영영 사랑할 거예요. 발로르 베임네크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당신, 베인이 제 안에 살아있게끔.

그대에게 포워르의 왕의 유일한 사랑과 베인의 연모를 바치도록 하지. 그대가 한 번은 보답받았다는 증표로서 말이야.

우리는 뒤틀렸네요.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그러기만을 바랐지.

당신은 끝까지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두네요. 제가 만난 이들 중 가장 눈이 시리도록 어두웠던 이인데도.

…… 그대는…….

베인.

내가 보았던 이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제발…….

…… 너무나도, 찬연하게 눈부시군.

…….

눈이 시린 어둠이 녹아내리듯 사라진 자리에서 밀레시안은 한참동안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 차라리 신화에서처럼 마왕의 잘린 머리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 그를 죽였다 자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검붉은 깃, 흑단 같은 머리칼, 타오르듯 붉은 눈동자 따위를 망막에 되새기며,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가장 지독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저주란 가장 찬란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왕은 그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니 굳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 따위를 속삭였다. 그래야만 그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아, 사랑.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구나…….

그는 조금도 남지 않은 잔해를 그러모아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대고 꾸욱 눌렀다. 사랑하는 그를 가슴에 묻었다.

가장 친애하는 숙적, 가장 시린 저주를 남긴 그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