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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 코토
자캐결연2025.07.08 23:30

• 잔인한 묘사, 가족간 위계에 의한 정서적 학대와 가스라이팅 묘사.


…… 피비린내 나.

그가 멍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 생각해 낸 말은 고작 이 두 단어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 안 나는걸. 피비린내 나. 머리 멍해. 온몸이 찌뿌둥해. 보고…… 싶어. 장난감 상자에 손을 넣고 잡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내는 것처럼 문장이 마구 배열된다. 눈 내리는 밤하늘 아래, 온몸이 피에 절어 있는 소년이 하얀 숨을 뱉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에 굉장히 분개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를 전혀 모르겠다. 화내다가, 음, 그러니까……. 때려 부쉈나? 그에겐 단점이 아주 여러 개 존재하는데, 첫째는 멍청한 것이고 둘째도 멍청한 것이고 셋째도 멍청한 거다. 그리고 그 넷째가 ‘다소’ 폭력적인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었다.

배고파. 배고픈 걸 보니 몸을 움직인 건 확실했다. 그보다 우선 피가 묻은 걸 넘어서 젓갈처럼 절여져 있는 걸 보니 무리할 정도로 뭔갈 한 건 분명했다. 전투가 있었나? 전투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전투가 있었다면 적을 마주친 기억이나 전투를 치른 기억 같은 게 있어야 한다. 아니, 애초에 리바이어선이 뭐라도 말했거나 했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 그 인간. 그는 눈을 꾹 감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과연 오버드의 회복력이란 괴물 같은 면이 있어서, 바닥 밑을 치고 있던 체력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쯤 되면 근육통이 와 있을 것 같았다. 그 점이 못내 아쉬운 듯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정도 체력이 회복되니 느껴지지 않던 것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들린다.

콩, 콩, 콩……. 아주 미약하지만 멈추지 않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마 그 인간의 것이겠지. 킁, 하고 숨을 한 번 들이켠 소년이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하나가 골목을 위태롭게 비추며 잿빛 하늘에서 먼지 같은 눈송이가 떨어지며 쌓이고 있었다. 소년의 몸에도 제법 쌓여 있었던 모양인지,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따라 새빨간 눈 뭉치가 후두둑 떨어졌다. 피 묻은 눈이 빙수처럼 보여서 약간 더 배가 고파졌다. 피비린내는 여전히 심하지만, 코도 익숙해져서 이젠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콩,

심장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콩,

그 인간은 그곳에 누워 있었다. 아주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콩.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이딴 지독한 모습으로도 살아 있다니, 경탄을 금치 못할 노릇이다. 나라면 진즉 죽었어. 조금 쉰 목소리로 이슈인 코토는 엉금엉금 기어 그 인간—토키와 소요의 곁으로 갔다.

그는 코토와 마찬가지로 피에 절어 있었는데, 옷가지가 넝마처럼 찢겨 있었다. 찢긴 천 사이로 서로 엉겨붙기 시작한 상처도 보였다. 얼굴은 특히 심했는데, 코토는 그가 토키와 소요라는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더라면 그를 알아보지 못할뻔했다. 여름 저녁의 하늘 같은 보랏빛 머리칼도 석양에 삼켜진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날 또 화나게 하다니. 그러니까 당신이 미운 거야. 멍청이. 짜증나. 죽지도 않고.”

코토는 아물어가는 상처에 주먹질했다. 신음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그는 미동도 없었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고, 입은 멍청하게 벌어져 떨어지는 눈이 간혹 그 안으로 떨어졌다. 체온이 아주 낮은 모양인지 그의 위로 떨어지는 눈은 녹지 않고 쌓였다. 코토가 그를 내려다 보는 동안, 그는 점점 눈사람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전부 기억났다. 코토는 괜스레 그의 위로 엎어져 제 몸으로 그를 꾹 눌렀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 소리는 들린다. 아까보단 조금 더 세게, 쿵, 쿵, 쿵, 하고.

‘코토? 이런 곳에서 뭐 하니……?’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한겨울 밤, 눈이 내리는 공원의 벤치에 겉옷도 없이 앉아 있던 코토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표정을 찌푸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마도 ‘당신이 그딴 거 알아서 뭐 하게? 기분 잡쳐. 갈래.’ 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했다.

코토는 쫓겨났다. 코토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매 주마다 레벨 테스트를 진행하는데, 결과는 늘 학생을 거치지 않고 보호자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코토의 단점이 제 명성을 발휘하는 바람에 코토는 또 레벨 테스트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았다. 도내에서도 엘리트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인지라 가장 낮은 성적인 건 당연한 이야기였고, 그에 따라 당연히 석차도 뒤에서 1등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불같이 화나셨다. 코토는 고개를 떨군 채 식은 땀을 흘리며 아버지의 ‘충고’를 새겨들었다. 확실히 못난 놈은 못난 놈이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피땀 흘려 번 돈인데,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호화롭게 지내 놓고, 아버지께 가슴 펴고 보여드릴 수 있을만한 성과는 전혀 내지도 못하며 쓰레기처럼 돈만 축내고 있는 자신이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따위의 말로는 그 죄를 갚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당장 밖으로 나가서, 오늘 밤 동안 들어오지 말아라. 네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호사로운 것인지 깨달은 뒤에 들어와라.’

밖은 영하. 눈이 펄펄 내리는 지독할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언제나 정확한 때에 정확한 정도로 주어졌고,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서 코토는 시인하며 그대로 따랐다. 겉옷 하나 걸치지 못하고 교복 차림 그대로 쫓겨나며 코토는 아버지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 어머니는 땅을 바라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고, 동생은 벌레만도 못한 놈을 보는 표정으로 코토를 보고 있었다. 코토는 공감했다. 동시에 고개를 떨구고 집을 떠났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잿빛 허공을 하얗게 맴돌며 덧칠했다. 과연 제 잘못을 깨닫기에 좋은 날씨였다. 코토는 우선 공원으로 걸었다. 이미 몇 번이나 쫓겨난 경험이 있기에 고를 수 있는 행선지였다. 더운 날이든 추운 날이든, 공원의 화장실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느정도 견딜 수 있었다. 다만 코토가 예상치 못한 게 있다면 그 공원의 화장실은 노숙자 대책으로 단속을 시작한지 며칠 정도 됐다는 것이었고, 코토가 들어가 라디에이터 앞에서 꽁꽁 언 손을 녹이고 있자 어김없이 사설 경비원이 들어와 ‘학생, 슬슬 집으로 돌아가.’ 라고 하며 쫓아냈다.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코토는 화장실을 나서 공원을 대충 몇 바퀴 돌았다. 그런 뒤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역시 있을 곳이 없다. 이 지구상에, 아니 이 일본만 해도 이렇게나 땅이 넓은데 있어도 되는 곳이 없다. 이대로 그냥 사라져버릴까, 그렇게 되면 누구나 기뻐하지 않을까, 지구도 쓸데없이 산소나 낭비하는 버러지 한 마리가 없어지면 기뻐할 것 같았다. 슬슬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고 옷은 눈송이로 젖었다. 그러던 참에 그가 온 것이다.

말해두자면, 코토는 그를 혐오한다. 한때는 그를 의지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정말 한때다. 코토는 그가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고, 동류인 이상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따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코토에게 사랑한다며 말하는 꼴이 우습지 않은가. 너무나도 기만적이지 않은가.

있을 자리가 없는 자들에겐 남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누군가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 남을 너무나도 미워하는 것이 그들이다. 너무 미운 나머지 죽어버리고 싶은 것이 그들이다. 코토다. 자신을 ‘파파’라고 지칭하는 토키와 소요다…….

덥썩, 손목이 붙들렸다. 그를 따돌리기 위해 가능한 한 성큼성큼 걸었지만 결국 따라잡힌 모양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골목길, 관리되지 않은 가로등 하나가 겨우 광원 역할을 하는 가운데 코토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돌아보았다. 비웃음이었다. 분노였다. 그냥, 부정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늘 웃음밖에 안 나왔다. 아버지께선 죽상으로 있을 바엔 차라리 웃으라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뭐 어쩌게? 어쩔 건데?! 이 기만자 자식, 이렇게 쫓아와서는 불쌍하다고 비웃을 거지? 어차피 안 될 거 용쓴다고 생각할 거지?!’
‘코토,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네가 갈 곳이 없다면…….’
‘닥쳐, 개자식아! 착한 사람 노릇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 어차피 너도 나 싫어하잖아, 죽도록 밉잖아! 짜증나고 귀찮잖아! 네 착한 척 놀이에 어울려주기 싫다고 내가 몇 번이나—’
‘이렇게 추운데 밖에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어쩌면 더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르고……. 코토. 파파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

코토는 흠칫 몸을 떨며 말을 멈추었다. 그는 어느정도 추론을 끝마친 뒤인 듯했다. 코토가 집에서 쫓겨났거나 가출했거나, 아무튼간에 오늘 밤에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시야가 흔들렸다. 수치스러웠다. 이딴 자식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내 집도 괜찮고, 내가 불편하다면 지부에서 키라라랑 함께 있어도 괜찮으니까. 오늘 밤은 실내에 있자. 응?’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난 이 자식과 다르게 돌아갈 가족이 있어. 그들 모두 나를 필요로 해. 날 사랑하진 않을지라도 내가 있어야 해. 누구나 미워할 사람이 필요하잖아. 그리고 내가 정말 쓸모 있어지면, 그러면 나를 정말 사랑해줄지도 모르잖아.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하지만 한 번도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단 말 들어본 적 없어. 이런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준 적 없어. 나는 이런 따뜻한 목소리는 몰라.

…… 여기서 당신을 따라가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어차피 파파도 집에 혼자니까,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싫다면 코토가 집에 혼자 있고 파파가 지부에 있어도 돼…….’

흔들리면 안 돼.

어느샌가 꼭 쥐어진 두 손을 뿌리치고 코토가 그의 목을 쥐어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올라타 억척 같은 손길로 그의 몸을 찢어발기며, 부러뜨리고, 상처입혔다.

혼자, 혼자, 당신도 혼자. 나도 혼자. 혼자인 주제에 누굴 사랑하며 누굴 포용하는가. 그럴 여유가 어디 있는가. 사랑받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정말로 나는 쓰레기다. 버러지다.

아, 그냥 이게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사랑받고 싶은 건지 밀어내고 싶은 건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아니, 사랑받는다면 아버지가 좋다. 아니, 아버지는 이미 날 사랑하셔! 사랑받은 적 없다고 인정하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사랑받은 적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아버지가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아냐, 똑같이 버려진 주제에 남을 믿고 사랑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아냐, 나는 버려진 적 없어…….

기억이 뚝 끊겼다. 정말 필름을 잘라낸 것처럼 깔끔하게 잘리고, 이어붙여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아마 용량도 얼마 없는 머리로 복잡한 생각을 하려니 한계가 왔던 모양이다.

콩닥, 콩닥,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제 조금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체 같던 몸에 온기가 돌아오며 눈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심장께에 쌓인 눈을 녹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 당신도…….”

그가 끙끙거리는 소리와 심장 소리가 들렸다. 코토는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질리지도, 않아……? 이딴, 매번, 당신한테 험한 소리나 하고, 죽을 때까지 패는 새끼한테……. 갱생의 여지도 없는 이런, 쓰레기, 한테, 정이나 주고…….”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크게 쉬었다. 하품이다.

“그만 기대하게 해……. 당신도 포기할 거 다 알아. 그런데 왜 계속 이러냐고…….”

아. 지쳐. 자고 싶어. 배고파. 돌아가고 싶어. 보고 싶어. 원초적인 욕구들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가운데, 생각을 거치지 않고 흐르는 말들만 그의 가슴께에 쌓여갔다. 따뜻한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느낌이 났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코토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콩닥콩닥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하는 음성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따뜻해지며 코토는 몸을 웅크렸다.

그날은 눈이 아주 펑펑 내렸다. S 공원에서 노숙자 한 명이 혹한에 동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밤샘 공부에 코피가 터져 휴지를 콧구멍에 쑤셔박으며 코토는 창밖을 보았다. 그날은 좋은 꿈을 꿨다. 넘어져 더러운 것이 묻은 몸을 누군가 정성스레 닦아 줬다. 보송한 냄새가 나는 옷을 입혀 주고, 자장가를 부르며 잘 자라고 달래주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아버지였는지 어머니였는지, 그렇잖으면 다른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 그 사람이었겠지. 연필을 꼭 쥐고 코토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의 집에서 눈을 뜬 코토는 깔끔하게 빨래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섰다. 그 집은 따뜻했고, 좋은 냄새가 났고, 그 사람은 하나 있는 침대에 자신을 눕혀 이불까지 덮어준 뒤에 토닥여주다가 기절하기라도 한 듯 침대맡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께선 별 말 없이 문을 열어주셨고, 앞으로 정진하라는 말과 함께 코토를 다시 방으로 처넣었다. 안에는 동생이 다 푼 문제집들이 한가득 있었다. 풀라는 뜻이었다.

집은 따뜻하다. 물론 좋은 냄새도 난다. 하지만 몸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질감이 든다. 하지만 그 집에선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곳에 영원히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 착각이겠지. 코토는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그저, 계속 그 생각이 났다.

자길 찢어죽이려 든 애를 앉은 채 잠들 때까지 보듬어 주면서,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쩌면 다른 모든 걸 이해해도 난 영원히 그걸 이해할 수 없겠지, 하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다.